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나루세 미키오 대표작과 연출기법 분석 (침묵, 일상, 여성의 내면)

by beautiful-soul1 2025. 6. 17.

나루세 미키오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Naruse Mikio)는 일본 근대 영화사에서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함께 ‘일본 3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감독입니다. 그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활동하며 주로 여성 인물의 일상과 감정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품들을 남겼고, 특히 ‘무언의 감정’과 ‘침묵의 연출’로 독자적인 영화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부운>, <흐르는 강물처럼>, <아내>,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어제와 오늘> 등은 나루세의 정제된 시선과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본문에서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세계를 ‘침묵’, ‘일상’, ‘여성의 내면’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침묵의 내레이션: 말하지 않는 감정의 설계

나루세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인물들이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갈등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거나, 감정을 폭발시키는 방식보다 침묵과 정적인 화면 속에서 관객 스스로 감정을 추측하게 만드는 연출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부운(浮雲, 1955)>은 전후 일본 여성의 삶을 담담하게 그린 걸작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유키코는 전쟁 중 만난 연인에게 집착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통받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감정을 소리쳐 표현하지 않습니다. 나루세는 무표정, 멈춤, 그리고 말없이 내리는 비 등을 통해 그녀의 좌절과 애착을 풍경과 동작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흐르는 강물처럼(流れる, 1956)>에서도 두드러집니다. 게이샤 하우스의 퇴락과 여인들의 불안한 감정을 나루세는 잔잔한 시선, 느린 동작, 짧은 대화로 포착했습니다. 카메라가 침묵하는 만큼, 관객은 스스로 인물의 감정을 채워 넣게 되며, 그 몰입감은 심리적 동화 수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루세에게 침묵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감정을 깊이 침잠시키는 장치이며, 갈등이 폭발하는 대신 서서히 썩어가는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2. 일상의 균열: 작고 사소한 현실의 파편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는 큰 사건이 아닌, 작은 일상의 흐름 속에서 감정과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사회 변화보다는 그 속에서 잊혀진 개인의 삶과 무력감에 주목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영화는 외형적으로는 지루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섬세하고 정직한 리얼리즘이 존재합니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 1960)>는 바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키코가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삶을 묘사했습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가난과 외로움에 지친 그녀의 일상은, 술을 따르고 계단을 오르는 반복적인 동작 속에서 그려집니다. 나루세는 이를 통해 일상 자체가 여성에게는 투쟁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집, 계단, 좁은 방, 전철 등 작은 공간과 일상의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그 속에서 인물들은 사회적 억압과 내면의 고독을 조용히 겪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삶의 무게를 직접 보여주지 않고도 관객이 그것을 ‘느끼게 하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아내(妻, 1953)>에서도 부부 사이의 심리적 거리, 반복되는 집안일, 생계의 고민 등이 대사 없이 생활 장면을 통해 서서히 침투하며, 감정의 클라이맥스 없이 잔잔하게 무너져가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3. 여성의 내면: 이해보다는 동행의 시선

나루세 미키오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여성 인물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여성을 단순히 희생적 존재나 순종적인 도구로 그리지 않고, 삶에 지친 현실적 인물로 정직하게 묘사했습니다. 나루세 영화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혼, 사별, 가난, 고용 불안정 등 시대적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리며 버팁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중심에는 게이샤 사회의 몰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의 불안, 자존감, 관계의 갈등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수동적이거나 불쌍한 인물이 아닌,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때로는 냉정하게 거절하며, 때로는 묵묵히 감당하는 능동적 존재입니다.

나루세의 시선은 여성의 내면을 남성 중심의 관점으로 해석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이 겪는 복잡한 감정과 선택의 순간에 ‘머무는’ 방식으로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여성의 시선’과도 가까운 태도이며, 감정의 해석보다 그 감정 곁에 있는 것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는 카메라를 낮추고, 천천히 움직이며, 얼굴보다는 손동작이나 뒷모습에 집중했습니다. 그 속에는 설명하지 않고도 전해지는 감정의 진동이 있으며, 이는 그의 영화가 지금까지도 깊은 여운을 주는 이유입니다.

나루세 미키오는 침묵으로 말하고, 일상으로 그리며, 여성의 내면에 깊이 다가가는 일본 영화의 거장이었습니다. 그의 영화는 소리 높이지 않지만,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리며, 사건보다는 사람을, 극적 장면보다는 현실의 무게를 담았습니다. 감정의 절제, 리얼리즘, 여성 중심의 서사를 고민하는 창작자라면, 나루세 미키오의 연출 세계는 반드시 거쳐야 할 감정의 지형도입니다. ‘조용하지만 강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면, 그의 영화는 훌륭한 기준점이 되어줄 것입니다.